
오늘 매불쇼네서는 전범선 작가가 출연하여 본인의 핏줄에 있는 영화같은 친일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혈의 누 작가 이인직, 그는 얼마나 친일파였을까?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대표작은 바로 「혈의 누」다.
교과서에서는 보통 이인직을 ‘신소설의 선구자’ 혹은 한국 근대소설의 출발점에 서 있는 작가로 소개한다.
그래서 문학사만 기억하고 있다면 이인직에게 근대적인 지식인, 새로운 문학을 개척한 선구자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의 정치적 행적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인직은 단순히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지식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이완용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는 과정에서 일본 측과 이완용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나라가 사라진 이후에도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에 참여했다.
그렇다면 이인직은 대체 어느 정도의 친일파였을까?
1. 문학가 이인직 이전에 정치인 이인직을 봐야 한다
이인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혈의 누」만 봐서는 부족하다.
그는 소설가인 동시에 언론인이었으며 정치 활동에도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1906년에는 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였던 「국민신보」의 주필을 맡았다.
이후 「만세보」가 재정난을 겪자 이를 인수해 「대한신문」으로 바꾸고 사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이완용이다.
「대한신문」은 이완용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인직 역시 이완용 계열의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이인직의 친일 행적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일본을 좋아했다거나 일본의 근대화를 동경했다는 수준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당시 대한제국의 권력 핵심에 자리 잡고 있던 친일 정치세력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2. 을사늑약과 한일병합늑약은 다른 사건이다
여기서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한일병합늑약은 서로 다른 사건이다.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압해 이른바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사실상 박탈당했고,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의 지배가 본격화됐다.
그러나 이때 대한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5년 뒤인 1910년에 벌어진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압해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고, 8월 29일 이를 공포했다.
이 사건을 한일병합, 경술국치라고 부른다.
또한 일본의 강압 아래 체결됐다는 점을 강조해 ‘한일병합늑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5년 을사늑약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1910년 한일병합늑약 =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과 일본의 식민지화
그리고 이인직의 친일 행적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1910년 한일병합 과정이다.
3. 결정적인 장면, 1910년 한일병합 과정
이인직의 친일 행적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이다.
1909년 12월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리고 1910년 8월에는 당시 통감부 외사국장이었던 고마쓰 미도리와 접촉한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핵심적인 사안이 바로 한국 병합 문제였다.
이인직은 이완용과 일본 통감부 측 사이에서 의사를 전달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급격하게 움직인다.
1910년 8월 16일부터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 사이에서 병합을 위한 본격적인 교섭이 진행됐다.
결국 1910년 8월 22일 강압적인 상황 속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됐고, 8월 29일 공포됐다.
이날을 우리는 경술국치라고 부른다.
대한제국은 국권을 빼앗겼고 이후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물론 한일병합을 이인직 한 사람이 주도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과장이다.
그러나 그를 단순한 방관자라고 평가하는 것 역시 사실과 거리가 멀다.
이인직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과정에서 일본 통감부 측과 이완용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바로 이 부분이 이인직의 친일 행적을 평가할 때 가장 무겁게 보아야 할 대목이다.
4. 그런데 이인직은 합방에 반대하기도 했다?
여기서 조금 복잡한 부분이 있다.
이인직이 일진회의 합방론을 비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 보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이인직도 한일병합에 반대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당시 친일세력도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송병준과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한 일진회 계열이 있었고, 이완용과 조중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 계열도 존재했다.
이들 사이에는 일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병합 과정과 이후의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충돌도 있었다.
이인직은 이 가운데 이완용 계열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인직이 일진회의 합방론이나 그 방식에 반대했던 사실을 곧바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항일 행동’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쉽게 말해 친일세력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노선과 이해관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5.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그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이인직의 행동이 당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루어진 일회성 선택이었다면 그의 역사적 평가에도 어느 정도 다른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일병합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그렇지 않다.
1911년 이인직은 조선총독부 체제 아래 설치된 경학원의 사성으로 임명됐다.
경학원은 조선총독부가 유교계와 지방 유림을 통제하고 회유하기 위해 활용했던 기관이었다.
이인직은 이곳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활동했다.
1913년에는 지방 유림을 대상으로 한 활동에서 조선왕조의 통치를 비판하는 한편 일본의 식민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취지의 강연도 했다.
즉 이인직의 행적을 시간순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흐름이 나타난다.
병합 이전에는 친일 정치세력과 함께 활동했다.
병합 과정에서는 일본 측과 이완용 사이의 연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병합 이후에는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이인직의 친일 행적을 단순히 ‘당시 지식인이 가지고 있었던 시대적 한계’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6. 그렇다면 「혈의 누」도 친일소설일까?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문제가 등장한다.
바로 이인직의 대표작 「혈의 누」다.
1906년에 발표된 「혈의 누」는 한국 신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에는 청일전쟁과 평양전투가 등장한다.
주인공 옥련은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진 뒤 일본인의 도움을 받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문명개화와 근대교육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개화기 소설이다.
그런데 이인직의 실제 정치적 행적을 알고 작품을 다시 읽으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품 속 조선은 낡고 혼란스러운 공간으로 나타나는 반면 일본과 서구는 근대적인 문명으로 나아가는 통로처럼 기능한다.
그렇다고 「혈의 누」를 단순한 친일 선전소설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당시 개화기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서구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통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혈의 누」에는 신교육, 여성교육, 자유결혼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새로운 문제의식도 담겨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혈의 누」에서 나타나는 이인직의 문명관과 그가 현실 정치에서 선택했던 친일적 근대화 노선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만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7. 이인직은 얼마나 친일파였을까?
결국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인직은 얼마나 친일파였을까?
그의 행적을 단계별로 놓아보면 상당히 명확하다.
일본의 근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지식인.
친일 언론 활동에 참여한 언론인.
이완용 계열과 함께 움직인 정치인.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서 일본 측과 이완용 사이를 연결한 협력자.
그리고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체제에 참여한 인물.
따라서 이인직을 단순히 ‘친일 성향이 있었던 문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의 실제 행적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한일병합 과정에 실질적으로 협력했고, 국권 상실 이후에도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적극적인 친일 인사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8. 신소설의 선구자와 친일파, 두 얼굴의 이인직
이인직이라는 인물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 근대사의 모순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라는 평가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과정에 협력한 친일 정치인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다.
모두 같은 이인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인직을 단순히 ‘신소설의 선구자’라는 한 문장으로 기억하는 것도 부족하다.
반대로 그가 친일파였다는 이유만으로 「혈의 누」가 가지고 있는 한국 문학사적 의미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 역시 역사와 문학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근대문학을 개척했던 지식인은 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을까?
그가 꿈꾸었던 ‘문명개화’와 ‘근대화’는 왜 일본 중심의 근대화와 결합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이인직은 단순한 친일 문인을 넘어선다.
그는 대한제국 말기 일부 지식인들이 꿈꾸었던 ‘근대화’라는 이상이 어떻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포섭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된다.
그리고 적어도 그의 정치적 행적만 놓고 본다면 결론은 비교적 분명하다.
이인직은 일본에 단순히 우호적이었던 지식인이 아니었다.
이완용 계열에서 활동하면서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 협력했고, 대한제국이 사라진 이후에도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에 참여했던 적극적인 친일 인사였다.
우리가 「혈의 누」의 작가라는 사실과 함께 기억해야 할 이인직의 또 다른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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